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(문단 편집) === [[북한|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]] === 테러의 당사자인 북한은 이중적인 태도를 취했다. 당시 지휘는 [[장성택]]의 친형인 [[장성우(1932)|장성우]]와 [[허담]] 조선로동당 국제비서가 주도했다. 북한은 그 해 10월 8일 남-북-미 3자 회담을 제안했는데 이는 남한을 대화 상대로 수용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의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고는 평가받았으나 이를 도모한 이유는 베일에 싸여 있다.[* 원 출처: <두 개의 한국> - 돈 오버더퍼 저. 이종길 역. 길산. 2002. p227~229.] 다만, 애초부터 버릴 패였던 이들에 대해서는 매우 가혹하게 굴었는데 2008년 사망한 강민철 상위의 가족들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고 시도때도 없이 암살 위협을 했다고 한다. 남한에 [[황장엽 망명 사건|망명]]한 [[황장엽]] 前 북한 조선로동당 비서의 말에 따르면 1983년 당시 북한의 [[김일성]], [[김정일]] 부자는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와 관련해 수습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소행임을 인정하는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고 한다. 김일성이 예전의 [[1.21 사태]]와 같이 "저 밑의 일선 과격분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느냐"고 먼저 제안했으나 김정일은 "절대 부인해야 된다"고 강경하게 반대했고 결국 김정일의 의견이 반영되어 오리발 모드로 나간 것이라고 한다. 이후 김정일은 1987년 [[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]]을 기점으로 대형 테러를 점차 줄여 나갔고 냉전이 끝나면서 고립을 탈피하려던 북한은 자유 진영 국가 상대로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피해자인 척 하며 얻어내는 [[저팔계 외교]]를 시행하기 시작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